"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동시에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 이태를 지내서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소임을 대신하니 벨릭스가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구류하여 두니라"
바울이 어디에 있건, 어떤 상황 속에 있건 복음은 끊임없이 그의 입술을 통하여 증거됩니다. 유대 총독 벨릭스는 그의 아내 (유대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복음의 정수 앞에 섭니다. 바울이 다른 이야기를 했겠습니까!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 을 강론하니 ...
복음을 대면한 벨릭스의 마음 가운데 두려움이 임했습니다. 외면상 유대 사회를 소요케 했던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바울을 통하여 그들이 주장하는 복음이 무엇인가? 호기심으로 다가섰던 벨릭스의 마음 가운데 두려운 마음의 동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합니다. "시방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부르리라 하고" 지금은 가라!!!! 지금은 아니라니요!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 우리는 늘 한번 더 생각해 보고, 조금 더 알아 보고 결정하기를 원합니다.
그 한번 더가, 그 조금만 더가 우리의 인생을 더 나은 길로 인도하리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더 나은 삶이란 것이 영원한 삶이 아닌 다만, 우리의 인생을 조금 더 편안길로 인도하는 것 뿐이라면 ... 이 얼마나 안타까운 순간입니까!
그 이태 동안 벨릭스는 더욱 자주 바울을 불러 함께 이야기를 나눕니다. 바울이 누구입니까? 오늘날 어떤 학자, 목사, 전도자가 바울과 비교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이태 동안 벨릭스가 꾸준하게 바울을 만났다면, 그를 통하여 회개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와야하지 않을까요!
그러나, 누가는 그런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다만, 왜 벨릭스가 더욱 자주 바울을 불렀는지 그 동기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복음을 알고자 혹은 예수를 알고자' 가 아닌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구원 받는 믿음은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그는 복음을 전할 뿐이요, 그와 함께 해온 하나님의 은혜를 나눌 수 있는 것 뿐입니다. 우리를 구원케 하시는 분은 오직 한분 가리워진 우리 마음을 두드리시는 성령 하나님 뿐이십니다.
그래서 벨릭스의 그 한마디 고백,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여 그로 자신을 돌아보게 했던 그 순간 그는 이렇게 고백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예수가 도대체 누구인가?" "내 마음을 두렵게 하는 이분을 내가 도대체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마음을 두렵게 하고, 찔리게 하는 그 성령님의 감동하심이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을 멈추고 우리 생각의 모든 터럭들을 그 분 앞에 쏟아놓기를 소망합니다. 아버지! 오직 이 순간 당신께만 초점을 맞추기 원합니다. 그 때 비로서 참 회개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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