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욱 목사

시편 92편 4-5, 8절

"여호와여 주의 행사로 나를 기쁘게 하셨으니 주의 손의 행사를 인하여 내가 높이 부르리이다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시편 92편의 부제는 [안식일의 찬송시] 로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부임하고 1년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니 역시 제 속에서 고민하고 끊임없이 생각했던 주제는 다른것이 아니였습니다. 교회란, 성도를 섬기는 것이란 무엇일까하는 주제였습니다.


하루 종일 시편 91편을 붙들고 있어도 도대체 이 말씀이 무엇을 나에게 도전하는가 묵상이 되지 않아 92편으로 넘어가니 그 첫 단어가 제 눈에 들어옵니다. 바로 이 시편의 부제인 "안식일의 찬송시" 라는 제목이었습니다.


한절한절 주신 말씀을 읽는 가운데 마음이 열립니다. 그리고 제 자신의 지난 1년의 예배를 주님께서 돌아보게 하십니다. 지난 1년 동안 예배에 소흘했었나 싶었습니다. 그런것이 아닌듯 합니다. 주님은 제가 다시금 예배가 무엇인지 깨닫고 그 기쁨속에 거하기를 원하시는 듯 합니다.


시편 기자는 노래합니다. "지존자여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며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을 나타내며 밤마다 주의 성실하심을 베풂이 좋으니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며, 주의 이름을 찬양하는 시편기자의 그 마음이 느껴지십니까!


아침에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눈을 뜨고, 밤이면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 하루를 마치기에 오직 그 마음이 기뻐 감사의 노래를 하는 시편기자의 마음입니다. 오직 그 하나님이 나만을 위하여 존재하시는 것 처럼 나를 위하여 행하시는 주의 그 손길을 그는 보았고 알았다고 고백합니다.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그의 이 고백이 마음에 깊이 새겨집니다. 그리고 나의 삶과 예배를 돌아보게 합니다. 진정 이러한 깨달음으로 나는 매 주일 하나님 앞에 서고 있는가!


예배는 하나님이 행하신 그 큰 일에 대한 감사와 찬송의 고백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분주한 삶의 자리에서 우리는 나를 위하여 이 큰 일을 행하시고, 나보다 앞서 내 길을 여시는 이 하나님의 손길을 체험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구별된 날 다 함께 모여 그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을 감격스럽게 예배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바램이나, 불평, 다른 생각이 끼어들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는 것입니다. (너무 이상적인 소리같이 들리십니까!)


그러나, 한 주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그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나를 위한 그분의 그 생각과 마음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오직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고 그 분을 기뻐해야 하는 예배에 우리는 얼마든지 하나님이 부재한 아니 하나님과 상관없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 한가지 깨달음이 옵니다. 이 시대 우리의 예배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나의 만족과 느낌과 깨달음이 아닐까 하는 것입니다. 지난 1년 저의 예배를 돌아보니 그 부담감과 짖누르는 압박으로 진정 하나님을 마음껏 높였던 예배가 있나 싶습니다.


오늘 새벽 하나님이 넌지시 말씀하십니다. '너의 어깨를 짓누르는 그 부담감, 내가 준것이 아니다~~~ 내가 언제 너에게 설교에 목숨걸라고 한적 있니? 나는 네가 그저 기쁘게 예배했으면 좋겠구나' 하시는 듯 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토록 지존하시니이다" 매일매일 이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고백하며, 이 하나님과 마음과 마음으로 교통한다면 저의 주일예배도 부담감보다는 기대감과 감사로 맞이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 듭니다.


시편기자의 눈에, 그의 마음에 오직 하나님만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악인은 풀 같이 생장하고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흥왕할찌라도 ..."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매한가지 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흩으시고, 심판으로 그들을 보응하신다 고백합니다.


악인이 잘 되는 것 처럼 보이고, 형통한듯 하지만, 결국 들소의 뿔같이 높이 들리우고 기름부음 받는 것은 바로 "나"라고 자랑합니다. 악인은 시작과 끝이 다르지만, 의인은 시작과 끝이 한결같습니다. 물론, 그 중간의 삶이 의인을 늘 고통스럽게 하지만 말입니다.


악인을 풀에 비유하는 시편기자는 의인을 종려나무와 백향목으로 비유합니다.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발육하리로다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리로다" 둘다 번성하는 것은 똑같습니다. 그러나, 무엇이 다릅니까!


풀이 자라나는 속도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러나, 그 수명은 하루밤 사이입니다. 그러나 백향목은 '해발 2000m 이상에서만 자라며 적어도 300년은 자라야 목재로 사용 가능하고, 400년이 되어야 열매가 열리는 목재' 입니다. 왜 성전을 백향목으로 짓는지 이해가 갑니다.


하나님이 성도를 어떻게 빚어가시는지 이제서야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천년을 지나간 어제와같이 여기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분은 고이고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빚어가십니다. 세찬 풍파속에서도 기다리시며 오직 청청하고 푸르른 의의 나무처럼 올 곧게 그렇게 빚어가십니다.


예배는 그 하나님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자들이 ... 인생의 그 어떤 풍파속에서도 오직 그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가겠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예배에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설교 한편에 온 마음을 쏟고 그 짓누르는 무게로 살아가는 것이 뭐 그렇게 나쁜 모습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오늘 이 시편 92편의 말씀으로 부드럽게 제게 말씀하십니다. 설교가 너를 살리는 것도, 성도를 변화시키것이 아니라, 바로 "나" 다. 이 말씀이 생명이란다.


생명의 말씀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 순간의 행복이 있습니다. 그 말씀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순간의 축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번 한주는 묵상한대로 ... 이번주 설교는 주님 주신 마음을 가지고 부담감이 아닌 기대와 소망과 감사로 서야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보이는 저 백향목처럼 그렇게 올곳에 서가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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