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
시편 97편은 "여호와께서 통치하시나니 ..." 로 시작합니다. 이 땅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통치는 어떻게 구현되는 것일까요? 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신 그 하나님의 통치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을까요?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통치에 반응하는 자연을 묘사하므로 이 노래를 시작합니다. "...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적으로 대면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는 항상 구름과 흑암으로 가리워진채 드러납니다.
뿐만 아니라, 그 하나님의 영광은 속한것이 범접할 수 없기에 타오르는 불로, 번쩍이는 번개로 묘사됩니다. 땅이 보고 떨며, 산들이 밀 같이 녹는다고 묘사합니다. 하나님의 통치는 다른 것이 아닌 의와 공평으로 이 땅 가운데 드러납니다. 어떻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어떻게 보면, 시편 97편은 인간의 이해로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운 시적언어들로 가득한듯 보여집니다.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 위에 초월하시는 하나님' 을 어찌 우리가 이해한답시고 그 분은 이러이러한 분입니다 묘사해 낼 수가 있겠습니까!
다만, 시편기자가 표현해 내는 그 어떤 묘사보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은 더욱 높고, 더욱 크고, 더욱 완전하다는 사실 하나를 깊이 음미할 뿐입니다. 그런 시편기자가 외칩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마치 기다리고 기다리던 동지를 만난 듯한 감격스러운 외침입니다.
그런데 그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라 호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악을 미워하라 명령합니다. 문득 고개가 갸웃거려 집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여호와를 더욱 사랑할찌어다! 일면 그렇게 외치는 것이 더욱 멋지고, 마음에 와 닿을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부족해서 죄가 들어온 것인가? 그분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이스라엘이 범죄한 것인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우리가 입술로 그토록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것인가? 도대체 무엇이지 ... 고개가 더욱 갸웃거려집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언제 흘러 넘친적이 있었던가요? 다만 우리가 죄를 짓고, 그 죄가 들어났기에 그분의 사랑이 무엇인지, 그 사랑에 어떤 능력이 있는지, 그 사랑이 어떻게 우리의 죄를 덮어내는지 알게된 것이 아니였던가요?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했음이, 그리고 그 사랑을 포기한 적이 없음이 가슴 절절히 깨달아 집니다.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생명의 샘이라 이야기 할 뿐만 아니라,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이야기 합니다. 아~ 비로서 시편기자가 바라보는 이 세상이 어떤 곳인지가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 땅은 여호와의 통치를 인정하지 않는 곳입니다.
그래서 온 땅과 산이 섬들과 하늘이 하나님의 통치 앞에 부르르 떨며, 그 하나님의 통치를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가운데서도 오직 사람들의 모습은 여전히 조각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긍하는 어리석은 모습들이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때 시편 기자의 눈에 여호와를 사랑하는 그들이 보인것입니다. 그래서 기뻐 외쳤던 것입니다. 이제서야 하나님의 통치가 그들을 통하여 드러날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들이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므로 그분의 공평과 정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의한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드러나려면 저 악한 자들의 불의함, 부조리함이 바로 그들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을 통하여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언제 어디에서 드러나는가? 바로 악한 세상 가운데 불의한 자들의 삶에 자리에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누가 악한 자이며, 누가 불의한 세상을 이끌어가는 자입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와 깊이 연결되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악을 미워하고, 그 악과 타협하지 않으므로 악한자들의 타겟이 되어, 그들의 올무에 빠져 고통당하는 그 현장이 바로 하나님이 간섭하시는 자리이고,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가 드러나는 자리인 것입니다. 왜 시편기자가 악을 미워하라 이야기 했는지 이해가 됩니다.
악한 자가 쓴 겸손과 위선의 탈을 벗길 자들이 바로 그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시편 97편은 자연스럽게 여호와가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시편 기자는 여기서도 시적 표현으로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악인을 징계하시고, 공평과 정의로 악한 세상을 바로 잡는 분이시다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시적 언어로 기가막힌 묘사를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시고,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렸도다.' 칠흑 같은 한 밤 중에 하늘로부터 뿌려지는 그 찬란한 빛의 향연, 절망과 고통의 나락속에 그 모든것을 덮어 버리는 기쁨의 향연이 바로 의인들의 삶 가운데 나타난다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통치는 다른 이가 아닌 바로 그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에게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통치가 이 땅 가운데 공평과 정의로 드러날 때 비로서 그들은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고 그 거룩한 이름 즉 그의 행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게되는 것입니다.
성도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기뻐하고 즐거워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이 성도를 위하여 빛을 뿌리시고, 기쁨을 뿌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심령 깊은 곳에 뿌리워진 이 빛, 이 기쁨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풍성케 하는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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