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돈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들었더니 웃사가 손을 펴서 궤를 붙듦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치시매 그가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으니라 여호와께서 웃사의 몸을 찢으셨으므로 다윗이 노하여 그 곳을 베레스 웃사라 부르니 그 이름이 오늘까지 이르니라 그 날에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르되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궤를 내 곳으로 오게 하리요 하고"
성경을 읽다보면 사뭇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어, 하나님이 왜 이렇게 행동하시지! 긴 시간 방치되 온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이 프로젝트는 기쁨으로 시작되었지만 하나님의 진노 앞에 멈추어 서게 됩니다.
소가 끄는 수레에 담겨져 법궤가 옮겨질 때, 이 일을 주관하는 웃사가 소들이 뛰므로 그 법궤가 떨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것을 손으로 붙들매 하나님이 진노하사 그를 치셔서 그가 산산히 찢겨 거기 하나님 앞에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축제의 잔치가 일순간에 장례식 행렬이 된 것입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 일 앞에 다윗도 흥분하여 더는 이 일을 진행할 수 없었고, 그 법궤는 예루살렘이 아닌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메어 갑니다. 그리고 다윗은 두려우신 하나님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의 의미를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경 또한 그 내포된 의미들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이야기들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을 곱씹어 볼 때 비로서 더 나은 삶이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다윗과 백성들이 품은 뜻이 잘못된 것이 아니였습니다. 또한 이 일을 남모르게 원치 않았던 그 누가 존재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진노하신 것일까요?
이 일을 진행하던 웃사에게 남모를 죄가 있었던 것일까요? 법궤가 옮겨지는 이 일은 무엇보다 먼저 다윗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됩니다. 그가 이 모든 일을 마음에 품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이 일을 성대하게 준비하여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에게 맡깁니다.
웃사는 이 일을 구체적으로 실행해야 할 인물입니다. 다윗과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기럇여아림으로 향하고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제금과 나팔로 연주하며 흥을 돋습니다. 그런데 법궤는 소가 끄는 새 수레에 실려집니다.
법궤는 오직 레위인들 가운데 구별된 자들이 어깨에 메어 운반해야 하는 것을 잊은 것일까요? 거기에 모인 제사장들, 레위인들, 웃사 그리고 다윗까지 ... 그 누구도 이 일에 의문을 품은 자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 법궤가 어떻게 블레셋에서 기럇여아림으로 온 것입니까?
블레셋 사람들이 전리품으로 가져온 이 법궤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어 벧세메스로 보낼 때 그들은 그들에게 내린 재앙이 진정 하나님이 행하신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하여 멍에를 매지 아니한 젖 나는 소 두 마리에 수레를 붙여 벧세메스로 실어 보냅니다.
왜냐하면, 젖나는 두 마리의 소가 본능적으로라면 당연히 새끼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두마리의 소는 대로 한복판으로 울며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벧세메스로 나아갑니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돌려보내기 위하여 사용했던 방법이 소가 끄는 수레였다면, 이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데 사용해도 이상할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도 몰랐고, 하나님의 말씀도 무시한 처사인 것이 분명합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묻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법궤를 직접 만진 웃사의 잘못 위에 내려진 하나님의 진노였지만, 이 진노는 웃사 한 사람에게만 내려진 것이 아닙니다.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전체에 내린 하나님의 진노요, 경고인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해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두려워 했다는 것, 그래서 이 일을 다시금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것 그래서 그가 다시금 이 일을 하나님께 묻게 된 것 이것이 곧 다윗의 신앙이 여전히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일을 통하여 그가 무엇을 깨달았는지 성경은 말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의 지도자이니 너희와 너희 형제는 몸을 성결하게 하고 내가 마련한 곳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궤를 메어 올리라 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이는 우리가 규례대로 그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라 하니 (대상 15:12-13)" 웃사만의 죄가 아닌 우리 모두의 죄인 것입니다.
다윗의 다윗다움은 실수가 없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넘어지고 쓰러져도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일어선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위대함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다윗의 삶을 붙들고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며,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라는 한탄 뒤에 보다 더 분명한 기도로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하나님! 이 무지한 자에게 무엇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까! 하나님, 제게 당신의 뜻을 가르쳐 주옵소서! 깨닫게 하옵소서! 묻고,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올 때 왜 그렇게 그가 하나님 앞에서 기뻐했을까! 자기 체면과 부끄러움도 다 잊을 정도로 그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된 다윗의 그 마음이 상상이 되십니까! 실수와 넘어짐을 통해서도 한걸음 더 하나님께 나아가는 다윗! 그가 부럽고, 또 부럽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하나님을 기대하게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일어나는 바로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사람으로 조금 더 빚어질 것을 저 역시 소망하게 됩니다. 그분에게 구할 때, 그분의 마음에 한 걸음더 가까이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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