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의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 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어다보다가 다윗왕의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언약궤를 옮겨오는 15장의 이야기는 사울의 딸 미갈의 이야기로 마무리 됩니다. 그녀가 창으로 내어보다가 다윗이 춤추며 뛰노는 것을 보고 심중에 업신여겼더라! 왜 다윗의 아내 미갈이 아니라 사울의 딸 미갈입니까? 사무엘하 6장은 이 부분을 좀 더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언약궤를 옮긴 기쁨으로 다윗이 자기 가족을 축복하려 할 때에 미갈은 매몰차게 다윗을 몰아세웁니다. "... 이스라엘 왕이 오늘날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날 그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삼하 6:20)"
그러나, 다윗 역시 그런 미갈에 대한 못마땅함을 여지없이 드러냅니다. "...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저가 네 아비와 그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로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를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찌라도 네가 말한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 한지라 (삼하 6:21-22)"
그리고 사무엘서 기자는 마지막에 이와같은 코멘트를 덧 붙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으니라 (삼하 6:23)" 마치 미갈이 저주를 받은 것 처럼 묘사합니다. 물론,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미갈의 행동 그 어떤 것도 못마땅합니다.
온 백성이 언약궤를 맞이하기 위하여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이 일을 처음부터 마음에 품은 다윗은 지금까지 어떠한 일을 경험하며 여기까지 왔습니까? 그런데 그 아내 미갈은 이 성대하고 뜻깊은 역사적인 현장 앞에 나와서지 않았습니다. 단지 창문으로 내다봤습니다.
그녀에게 이 언약궤는 어떤 의미인가를 돌아보게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로 이 한 장면을 통하여 미갈을 판단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왜 그녀는 이 성대한 축제의 잔치 속에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까요? 왜 그녀는 남편 다윗의 마음과 하나이지 못했을까요?
미갈의 지나온 삶 속에 오늘 미갈의 행동이 투영되어 있음을 보게됩니다. 그녀는 사울의 둘째 딸로 다윗을 사랑했습니다. 또한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에도 그를 도망치게 한 장본인 이었습니다. 위기의 다윗을 구한 사랑하는 아내였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남편 다윗에게도 또한 아버지 사울에게도 온전히 사랑받지 못한 한 여인이었음을 성경은 드러냅니다. 사울은 다윗을 사위로 용납할 수 없어 미갈을 라이스의 아들 발디엘에게 시집을 보내고, 다윗은 사울의 대척점 가운데 서기 위하여 그것을 은연중 받아드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년이 지난 후 다윗은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정통성을 얻기 위하여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에게 자기의 원 아내였던 미갈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이스보셋은 발디엘로부터 미갈을 강제로 빼앗습니다. [그의 남편이 그녀와 함께오되 울며 바후림까지 따라오니라]
언약궤 앞에서(여호와 앞에서) 보여준 다윗과 미갈의 행동은 무엇이 옳은 것이고, 그릇된 것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나, 부부로서 한 마음 한 몸이어야 할 두 사람이 서로에게 보여준 행동은 과연 누구의 모습이 옳은가 그른가의 문제로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미갈이 왜 "다윗의 아내 미갈" 이 아닌 "사울의 딸 미갈" 이었는지는 분명합니다. 그녀는 그렇게 사울의 딸로 이스라엘 역사가운데 필요한 존재였을 뿐입니다. 두 딸의 아버지로, 또한 남편으로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깊이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무조건 미갈을 비난할 것도, 또 하나님 마음에 합한 다윗을 마냥 두분할 것도 아님을 다시금 돌아보게 됩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얽혀진 이 숱한 관계속에서 오직 선하신 당신의 뜻을 이뤄가시는 하나님의 그 섭리 앞에 침묵할 따름입니다.
하나님, 오늘도 내 옆에 있는 두 딸과 아내에게 그리고 우리 가족과 성도님들에게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깊이 돌아볼 수 있는 은혜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먼저는 하나님께 기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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