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형욱 목사

역대상 19장 1-3, 19b절

"그 후에 암몬 자손의 왕 나하스가 죽고 그 아들이 대신하여 왕이 되니 다윗이 가로되 하눈의 아비 나하스가 전에 내게 은혜를 베풀었으니 이제 내가 그 아들 하눈에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고 사자를 보내어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게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러 하눈에게 나아가 조상하매 암몬 자손의 방백들이 하눈에게 고하되 왕은 다윗이 조문사를 보낸 것이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그 신복이 왕에게 나아온 것이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 ... 이 후로는 아람 사람이 암몬 자손 돕기를 싫어하니라"


그 후에 ... 다윗의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삶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부르실 그날까지 우리는 매순간 "오늘" 을 살아갑니다. 승리의 기쁨도 사라지고, 패배의 아픔도 잊혀지며, 억울한 마음의 쓴뿌리도 또다시 반복되는 오늘 속에 묻혀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시간속에 나를 맡길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로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making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 매 순간을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기회로 여기며 그 시간/삶을 구원으로 건져 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흘러가는 이 시간속에서 가장 가치있는 삶으로 우리의 삶을 건져올릴수 있을까요? 다윗의 삶이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은혜가 깊이 채워지면 그 은혜는 반드시 흐르게 되어 있습니다.


은혜보다 더 강한 전파력이 있을까요? 은혜받은 자의 삶속에 함께 머물면 하나님을 깊이 체험합니다. 왜 뜨겁게 기도하는분들 옆에서 기도하다가 기도가 터지고, 전심으로 찬양하는 분들 옆에서 찬양하다가 가슴이 뜨거워지는 그런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그가 힘들었던 시절 암몬왕 나하스로부터 받은 은혜를 기억합니다. "전에 내가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 내가 은혜를 베풀리라!" 참 멋진 말입니다. "전에 ... 이제 ..." 시간이 흐르고 삶은 변했지만 그 전과 지금을 잇는 것은 다름 아닌 오직 은혜입니다.


다윗의 삶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인생처럼 보이지만 그가 변함없이 주 안에서 살아갈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는 자들을 오늘 본문은 보여줍니다. 바로 암몬 자손의 방백들과 나하스의 아들 하눈입니다.


왜 그들은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까? "의심" 때문입니다. "... 왕의 부친을 공경함인 줄로 여기시나이까 ... 이 땅을 엿보고 탐지하여 함락시키고자 함이 아니니이까" 의심은 은혜가 흘러들어와 채워져야 할 마음을 덮어 버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의심의 활동반경이 마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향한 멸시와 타툼으로 번져간다는데 있습니다. 왜 분노가 그렇지 않습니까!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는 분노가 폭력과 파괴의 에너지를 동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쏟아 놓고서는 얼마나 많이 후회합니까!


다윗의 조문단이 암몬 왕 하눈과 그의 방백들로부터 치욕을 당합니다. 이 또한 벌어진 일입니다. 이 일 후에 다윗은 어떻게 그의 신복들을 맞으며, 암몬 사람들은 어떻게 앞으로를 준비하는가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어옵니다.


다윗은 치욕을 당한 부하들을 배려하고자 예루살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하들을 보내어 여리고성에서 맞이하게 합니다. 이 또한 은혜를 베푸는 다윗의 모습입니다. 은혜는 베풀면 사라지는 소모품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풀수록 쌓여가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그래서 은혜를 흘려보내는 삶은 하나님을 더 깊이 온전하게 체험하는 것입니다. 한편, 의심으로 그 마음이 닫힌 암몬왕 하눈과 그의 방백들은 다윗에게 치욕을 주므로 그 어떤 만족과 평안함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엄청난 재물을 드려 전쟁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다윗과 암몬 사이의 일이 이제는 아람 군대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은혜로 시작된 일이 어떻게 이렇게 큰 전쟁으로 치닫게 된것입니까! 우리가 왜 마음속에 일어나는 그 작은 의심의 파편들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깨닫습니다. 성경은 선포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3)" 이 마음이 우리 스스로 지키고, 다스릴수 있는 마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죄도 다스릴수 있었고 오직 하나님이 뜻하시는 선한 일만 행하는 자로 여전히 죄 짓지 않고 살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능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이 우리 마음 한복판에 좌정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시므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 그 마음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갈 5:16-17)"


그래서 육체를 따라 살면 죄의 열매를 성령을 따라 살면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삶이 시작되는 곳은 다름 아닌 마음입니다. 오늘도 무엇을 따라 살아가기를 원하십니까? 마음의 욕망입니까 아니면 성령님의 인도하심입니까!


성령님의 인도함을 따라 은혜의 길을 걷는 이 하루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당신이 걷는 그 길 가운데 아름다운 믿음의 열매가 맺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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